요즘의 마진오
12월 마지막 날입니다. 함박눈이 내리다가, 새벽에는 비가 오다가, 오후인 지금 해가 나네요.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2023년의 마지막 해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2023년 내내 신기할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며 많은 일들을 해낸 저는, 11월 언리미티드에디션15 참가를 기점으로 팡 터져버렸습니다. 안을 빵빵하게 메우고 있던 에너지가 한 번에 분출되고 사라졌습니다.
11월 내내 느슨하게 살았고, 12월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달 쉬면 의욕이 차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요즘은 해야 하는 일들을 외면하며 만화책을 읽는답니다. <도로헤도로> 전 23권을 갑자기 결제해서 20권까지 읽었고, 읽다가 지쳐서 <나기의 휴식> 8권까지 전자책으로 구매해서 후루룩 읽었는데, <나기의 휴식> 8권이 완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절망한 것이 어제 밤까지의 일.
오늘이 올해 마지막 날인데 버찌와 뚠따따 차주 연재분도 준비하고, 미뤄둔 글도 쓰고, 스테디오 멤버십도 마무리하고, 2주에 한 번 보낸다고 했으면서 방치한 비밀편지도 쓰고, 보람차게 보내보자, 라고 새벽 6시에 일어났습니다만-
현재 시간이 오후 4시인데요, 내년 계획을 정리해서 다이어리에 적은 것이 지금까지 한 일의 끝이랍니다(아침에 버찌 산책도 다녀오고요).
이상해요. 2023년 중반의 마진오는 오후 4시 즈음에는 벌써 두 세 건의 일을 처리하고 난 다음이었거든요. 버찌와 뚠따따 그림 콘티도 마치고, 인스타툰도 그리고, 이런저런 메일도 답장한 다음 커피를 내려 한숨 돌리는 타이밍인데. 언리미티드 에디션 이후의 마진오는 오후 3-4시에 엉금엉금, 해가 떨어져가는 것을 확인하며 괴로워하며 책상에 앉습니다. 책상에 앉고 나서도 해야하는 일들을 직면하기 힘들어서 일력 그림을 룰루랄라 그리다가, 그것마저 질리면 갑자기 다이어리를 적거나 빈 노트에 아무 생각이나 적다가 핸드폰을 들고 누워버립니다. 그 행동의 말로는 깊은 낮잠입니다. 일어나면 어쩐지 버찌가 발치에서 함께 자고 있어요.
저녁을 먹고 나면 더더욱 의욕이 떨어져서 내일 새벽에 하자! 라는 상태가 됩니다만, 다음날 새벽에도 다이어리에 할 일을 잔뜩 적고 나면 힘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암전.
미친듯이 달리던 마진오는 어디에 간 것일까요?
올해의 마진오
올해엔 회사 밖에서 수입을 많이많이 만들어 회사를 나가는 게 목표였어요. 버찌와 뚠따따 연재료는 한계가 있어서 다른 길을 만들어 보려고 용을 썼습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서 일을 받고 싶어서 올 3월부터 기를 쓰고 주 7회 포스팅이라는 미친 짓도 해봤어요. 다행히 그게 먹혔고, 인스타그램 친구가 일만 명을 넘겼고, 그 이후에는 업무 문의하는 이메일이 자주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홍보 만화도 그리고, 일러스트 외주도 받아 보고, 브랜드툰도 맡아 보았어요. 책을 쓰자는 제의도 들어와서 계약서도 쓰고, 오프라인 모임에 게스트로도 나가 보고, 챌린지도 운영해보고요.
반전이 있다면, 전 올해 초에 과장급으로 승진을 해버려서 월급이 오른 상태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받은 외주 업무비를 모아봤자 오른 월급을 이길 수 없더군요. 그럼에도 해 보고 싶으니까, 해내고 싶으니까 한계까지 일을 받았습니다.
만성 수면부족. 주말엔 어디 나가지도 않고, 친구도 안 만나고 문화생활도 안 하고. 그런데도 제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시간에 쫓겨 질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게시물들은 나중에 보면 소름이 돋기도 했어요(재미있고 유용하게 읽어주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물론 내용은 오래오래 고안해서 작성한 내용이긴 한데, 그걸 풀어내는 방식도 그림도, 오래오래 보기에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1월 초, 대망의 언리미티드 에디션, 전국의 독립 창작자들이 일 년간 작업한 작업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순간. 만화가 모임 '모꼬지 코믹스' 부스로 페어에 참여한 저는 또 아연해지고 말았어요. 지난 2년간 제가 단독으로 작업한 책은 한 권도 없었으니까요. 모꼬지 코믹스에서 함께 낸 책과 ‘여섯잎클로버’라는 공통 주제로 각자 작업한 책이 있긴 했지만, 제가 몇 년 전부터 쭉 작업하고 있던 에세이 만화들은 아직도 무지 연습장에 그림 콘티로 남아있을 뿐, 손에 잡히는 무언가는 아녔습니다.
‘나 올해 뭐 한 거지?’
아주 열심히 달려왔는데, 목표로 한 곳에는 다다르지도 못하고, 다시금 알지 못하는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쉬어야겠다'고 느낀 지점은 지난지 오래였지만 그 때는 더 갈 곳도, 할 것도 없어 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드니의 마진오
6월에 예약해 둔 2주간의 휴가. 12월 1일에 떠나서 15일에 돌아오는 일정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닌 지난 10년간 이렇게 길게 휴가를 다녀온 적은 없었어요. 반 년간 동료들에게 2주간의 휴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암시를 건 다음(신기하게도 다들 제가 3주간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정작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출발하는 당일 얼레벌레 짐을 싸고 12월 1일 밤 여름의 도시로 출발했습니다.
푹 쉬고, 속도를 늦추고, 일을 쉬면 다음의 여정이 손에 잡힐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드니에서 하려던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 푹 자기, 알람 없이 일어나기
- 플랫화이트 많이 마시기
- 공원 혹은 해변에 누워 있기
- 책을 읽기
- 보고 싶던 드라마 몰아서 보기
다섯 가지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나날이었습니다. 비치 타올을 가져가서 공원 잔디밭에 깔고, 해변 모래에 깔고,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어요. 쉬운 영어로 된 종이책을 한 권 사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읽었습니다. 플랫화이트는, 음, 잠을 많이 자니까 커피가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아져서 많이 마시진 않았어요. 하지만 한 카페에서 파인애플 향이 나는 아이스 라떼를 마시고 눈이 번쩍 뜨여 원두까지 사버린 날이 있었고….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엔 숙소에 돌아와 침대나 소파에서 빈둥대고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2년 전에 추천받은 드라마를 드디어 보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는 눈 밑의 퍼런 그늘이 옅어지고 등엔 수영복 자국이 남은 채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어요. 머릿속에 항상 날파리처럼 떠돌던, ‘이래야 해…’, ‘저래야 해…’, ‘내 미래는…’ 따위의 단어들도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침묵.
아무 생각도, 의지도, 의욕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경기도의 마진오
시드니에서 얻어 온 고요한 상태는 지금도 지속 중입니다. 이상한 건 딱히 불안하지는 않다는 거에요. 2022년 말에 세웠던 목표대로 회사를 벗어나 버찌와 하루종일 함께하며 그리고 싶은 만화만 그릴 수는 없습니다. 목표는 대실패. 그치만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해서 제가 놓고 온 자리에서 그다지 진전하지 않은 일들을 등에 얹고 기어가는 중입니다.
다른 목표들도 볼까요.
경제적 자유, 그건 시드니 여행 이후 카드빚이 얹혀지며 조금 더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유명세, 작년과 2023년 중반까지는 그렇게 갈망했던 것인데, 감당할 수 있는 유명세는 딱 지금 상태인가봐요. 친구가 만 명이나 있는데 뭘 더 바라나- 라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유명해져도 바랄 수 있는 결과는 광고 단가가 올라가는 것 정도인데, 내년에는 광고를 그릴 시간에 제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세웠던 목표는 죄다 참패한 채 덤덤한 마음으로 새로운 해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목표라기보다는 어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지향점을요. 색깔을 쌓아 올리는 창작자가 되고, 입으로만 세상을 위하는 건 멈추고 영향력 있는 행동을 하고, 요리도 운전도 꽤 하는 능숙한 생활인이 되려 합니다. 수영을 배워서 여행 갔을 때 바다나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떠다니는 여행의 가중치를 획득하려 하고요, 따뜻하고 꼼꼼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인 채로 떠나면 어디에 도착하든 올해보다는 덜 지쳐 있을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지점에 발을 디뎌도 마음이 느긋할 것 같고요.
여기서 갑자기 올해를 마감하자면- 독기가 바짝 들어서 마구마구 달리다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나자빠진 2023년의 마진오, 엄청나게 노력해주었지만 결과가 잘 안 나와서 미안합니다. 극한까지 속세의 가치를 쫓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어중간하게 마음 한 구석에 ‘성공하자!’라는 포스터를 걸고 있는 것보다, 깃발을 만들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장렬히 실패하는 것이 좋네요.
2023년 11월 어느 날 무너져서 아직도 누워 있는 2023년의 마진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섭섭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렇게 크지는 않은) 돈과 명예의 맛을 보고 난 뒤 꾸물꾸물 저밖에 남아 있지 않은 미래의 어떤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는 그저 좋은 만화를 그리는 일밖엔 고민하지 않을 거에요. 따뜻하고 꼼꼼한 사람인 척 하기 위한 20%의 상비 에너지를 꼬박꼬박 남겨두는 일도 잊지 않고, 반기별로 게으름을 부리고요. 그리고 통상적인 생활인이 되기 위한 작은 노력들도 지속하겠습니다.
여러분의 2024년
쓰기 힘들었던 편지인데 적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군요. 여튼 소식이 끊긴 동안 저는 이러하였습니다. 진부하고 뻔한 말들을 몸으로 겪었다는 것으로 소식을 요약할 수 있겠네요.
여러분의 2023년은 어땠나요?
분명한 것은 올해도 우리는 이리저리 헤맸다는 것, 12월 마지막 날인 오늘, 2023년 1월 1일에 목적한 바와 다른 곳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하다는 것, 그렇지만 이 지점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헤매리라는 것. 하지만 헤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살아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가능성이든 탐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저희를 울게 하든 웃게 하든요.
내년 12월 31일에는 어디에 어떤 표정으로 도착해 있으려나요?
<빨간머리 앤>에 나온 문장으로 올해 마지막 비밀편지를 맺어봅니다.
“퀸즈 아카데미를 떠났을 때, 미래는 직선 도로처럼 제 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멀리까지 이 길을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았죠. 그치만 그 길에는 모퉁이가 하나 있어요. 이 모퉁이 뒤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고의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믿을래요. 모퉁이는 그 자체로 매력이 있어요, 마릴라. 그 뒤에 어떤 길이 있을지 궁금해요. 초록빛 영광으로 빛나는 나무들과, 그 아래로 어룽진 빛과 그림자들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풍경들이 있을지,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지, 어떤 굽이들과 언덕과 골짜기들이 더 있을지 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