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주에 없는 것
동행을 만나 11시 30분에 아테네 힐링상담 부스에 착석! 공주님 왕관을 쓰신 유진님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듣자마자 중얼중얼 키워드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사주에 목이 하나도 없어요!"
"목은 뭔가를 시작하는 기운, 열정인데,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게 힘들 수가 있어요."
목이 없는 사람은 식물을 가까이 두는 게 좋고(그래서 화분을 말려 죽이면서도 자꾸만 집안으로 들였나봅니다), 초록색 물건이나 옷, 소품으로 싱그러운 에너지를 받는 것도 좋고, 산에 다니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버찌가 그걸 알고 나를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녔나?!'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가 심리적인 안정 궤도로 돌아오게 된 것도 버찌와 미친듯이 산책을 쏘다닌 덕이었거든요. 일어나자마자 밖에 뛰쳐 나가 햇빛을 쪼이면서 걷는 활동은 사주에 목이 없는 이에게만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요. 여튼 굉장히 납득이 가면서, 버찌와 만난 건 운명이라고 3056번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이 0%라면, 화는 10%밖에 없어요. 화는 뭔가를 만드는 영역인데요, 요리, 뜨개질, 영상편집, 제조... 다 포함돼요. 만드는 활동을 해서 오행의 흐름을 돌려주시는 게 좋아요. 이런 직업 해도 좋고요."
만드는 거라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구장창 하고 있습니다. 색종이 접기, 지점토 공예, 뜨개질, 위빙처럼 손으로 만드는 취미도 꾸준히 있었고, 몇 년 전부터는 계속 만화를 그렸지요.
"보면, 다들 자기가 부족한 부분은 알아서 챙기고 계시더라고요. 중장년 이상의 분들과 이야기하면 취미로든 직업으로든 모자란 부분을 채워 균형을 맞춘 상태였어요."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운명인가봐요. 왜 사서 고생하는지 의문이었거든요(물론 사주풀이를 계속 듣다 보니 사서 고생하는 것도 기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시긴 했는데...). 아무것도 창작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드는데, 활활 타오르는 기운이 부족해져서 그런 거라 해석하니 납득이 갑니다.
앞으로의 흐름까지 쭉 듣고, 보너스로 타로 카드까지 읽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흘렀떠라고요. 타로를 볼 때에는 눈물이 찔끔 날 뻔했습니다. 그리고 유진님이 장담했던 것처럼('제게 본 사람들은 앞으로 저한테만 보겠다고 해요!') 다음에 유진님이 제가 사는 동네 근처로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비건페스티벌에 없는 것
상담이 끝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배가 고픈데 고민해서 무얼 합니까. 페스티벌의 꽃은 음식! 장내를 뱅뱅 돌면서 어떤 걸 먹을까 동행과 진지하게 논의하여 아래의 아이템을 선정했습니다.
떡볶이
핫도그
군만두
실패가 없는 아이템들 아닙니까? 물론 떡볶이는 집에서 만든 것 같은 청정하고 건강한 맛이 났고, 핫도그는 간을 절반으로 줄인 듯한 청초한 맛이 났으며, 군만두도 살짝 맹맹했지만... 점점 늘어나는 인파와 개들을 구경하며 햇빛 아래 계단참에 앉아 있노라니 참 좋더군요. 페스티벌임에도 방방 뛰지 않고, 느슨하고 여유로운 텐션이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분식 3대장을 먹고 슬슬 두유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하고 있는데, 동행이 엄중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전 아직 디저트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안 되었어요. 이것들(떡볶이, 핫도그, 군만두)은 식사로 못 칩니다."
"그러면 식사는 어떤...?"
다회용 용기와 텀블러를 챙겨 다시 장내로 내려가며 제가 물었습니다.
"밥이 있는 도시락이면 될까요?"
"도시락... 흐음..."
동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밥이랑 대체육이 있는 그 도시락 말이죠. 지나가면서 봤는데 그건 별로 당기지가 않았어요."
그러더니 사자후를 내지릅니다.
"비건 페스티벌인데 왜! 풀이! 식물이 없는 거여!"
빵과 분식, 간식은 많은데 샐러드며 나물이며 야채가 없다고 투덜투덜대는 동행. 비건식 중에 제일 편한 게 풀 먹는 건데 풀이 없다고, 상큼하고 신선한 채소가 먹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샐러드를 메뉴판에 적어둔 부스를 발견합니다.
"샐러드... 매진인 건가요? 테이블에 안 나와 있어가지고요."
"아, 오전에는 진열해 두었는데 해가 많이 들어서 풀이 숨이 죽더라고요. 샘플 음식들은 다 집어 넣어두었어요."
"음식이 안 나와 있으니까 뭘 파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림 메뉴판 말고 음식을 다시 꺼내서 디스플레이 해두시는 게 어떨까요?"
여러번 캣 페어에 나갔던 공력(?)으로 이것저것 조언을 시작하는 캐스트하우스 대표님 겸 젤리브레드 대표님. 한 분은 뒤쪽에서 묵묵히 샐러드를 만드시고, 한 분은 앞에서 동행의 질문 세례를 버텨냅니다.
그렇게 완성된 시저샐러드는 신선한 채소에 드레싱이 듬뿍 얹혀지고, 바삭한 베이컨의 맛을 재현한 무언가(곡물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 나지 않아요)를 토핑으로 와르르 뿌린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였습니다. 꽤 큰 사이즈로 챙겨온 락앤락을 꽉 채울 정도로 양도 푸짐했고요.
"오 맛있어!"
"..."
"...그런데 다 못 먹겠어요!"
저보고 소식가라더니... 지금까지 먹은 건 식사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결국 동행은 락앤락에 야무지게 샐러드를 챙겨 캐스트하우스를 돌보러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