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하면 보이는 작가들의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은 후 관람 모드로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사진이 없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다른 북페어와 다른 칸새만의 특징을 적어볼까 해요. 그 정도로 칸새는 기존의 북페어와 다르더라고요.
칸새 = 독립출판만화 ‘판매전’!
판매+전, 즉 판매를 위한 ‘전시’에 방점이 강하게 찍혀 있습니다. 보통 페어는 작가가 부스에 상주하며 영업을 해야 하는데요, 이틀이나 사흘씩 하루 종일 앉아서 관람객 대상으로 책을 판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지요.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군가를 마주하고 적극적으로 영업한다는 건, 내향인 비중이 높은 작가들에겐 상당히 도전적인 일입니다.
대면 영업의 부담에서 해방되다
제일 첫 관문은 어쨌든 마감일이 있기 때문에 겨우겨우 완성한, 부족한 자신의 책을 코앞에서 읽는 독자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아마 작가를 위한 지옥이 있다면 이런 형벌이 반드시 있을 거에요. 부랴부랴 책을 뽑고 나서는 본인도 민망해서 들춰보지 않는데 진지한 얼굴로 읽어주는 독자님을 만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째서 스토리를 좀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날림으로 그렸을까? 어째서 이런이런 실수를 했을까?(보통 이 실수라는 건 읽는 사람에겐 보이지도 않습니다)
자괴감의 소용돌이에 허덕이면서도 자신감 있는 척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무슨 고민을 했고 노력을 했는지 영업 멘트를 날리고 나면 영혼이 공허해집니다. 하지만 그 책을 완판하기 전에는 민망함의 지옥을 벗어날 길이 없으니, 부족한 걸 알고 있는 책을 최선을 다해 영업합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돈도 안 되는데 이런 책은 왜 만드세요?’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하고, 실컷 책의 내용을 설명했더니 ‘어떤 종이에 인쇄하신 거에요? 인쇄소 알려주실 수 있나요? 몇 부 뽑으셨어요?’ 라고 묻는 분도 있어요. 물론 책의 만듦새가 좋아서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추후 본인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은 뒤 구매하지 않고 쌩 떠나면 빈정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죠.
마지막으로 페어에 나가면 책을 제일 많이 사는 건 작가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작을 하니 다른 창작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고요, 창작물은 사주는 것이 최고의 응원이라는 걸 알고 있어 안면이 있는 작가들의 신작은 되도록 구매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창작판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니 어떤 식으로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죠. 하지만 페어에 나간 작가들의 대다수와 안면이 있다면? 혹은 한 다리 건너서라도 아는 작가들이 엄청 많다면? 부스에 들러서 인사하고 싶은데 들린 부스 전부에서 책을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요?
이런 고충이 없는, 내향인을 위한 만화 축제로 기획되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오로지 책이라는 결과물에 집중하다
여타 페어와 또 다른 점은 작가 한 명당 한 권의 책만 출품할 수 있다는 겁니다. 페어에 나갈 땐 한 권만 보유한 사람은 불리합니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볼거리를 원하는데, 한 부스에 한 종류의 책만 가득하다면 금방 보고 떠나겠죠. 이 때문에 책을 처음 만들 땐 페어 참가자에 선정될 확률이 많이 떨어져요. 이럴 때는 다른 작가와 함께 부스를 내서 공략하는 전략이 먹힙니다. 하지만 독립출판에 갓 발을 들였는데 아는 작가가 많을리도 없고, 페어 기간 내내 찰싹 붙어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겠죠.
이력이 길든 짧든 한 명당 딱 한 권의 책만 낼 수 있는 구조는 이래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신간을 공개하려는 작가도 딱 그 한 권에만 집중할 수 있고, 구간이 있는 작가도 여러 권 챙기고 포장할 것 없이 딱 한 종류만 정리하면 되니까 마음이 편하지요.
또 책만 오롯이 출품되어 전시되어 있다 보니 작가의 영향력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북페어에 가보신 분들은 아실 거에요. 인기 작가의 부스 앞에는 언제나 사람이 가득하다는 것을. 해당 작가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더라도 부스가 북적이면 호기심이 생기게 되죠. 칸새에서는 책 외의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독자가 순수하게 책이라는 결과물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칸새 mini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의자들이 이번에도 다시 등장하여 쾌적한 열람을 도왔어요. 행사장은 페어가 아니라 전시회장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조용했고, 스탭들은 ‘독서가 길어질 것 같으면 앉아서 읽으시라’고 안내해주었죠. 2시간이라는 관람 타임도 전시된 책을 진득히, 꼼꼼히 읽어주길 바라는 칸새측의 배려 같았습니다. 페어에서는 뒤에서 밀려오는 관람객의 인파도 있고, 앞에 서 있는 작가님도 있어 최대한 빠르게 책을 훑어보고 구매하게 되는데, 칸새에서는 책을 구매하든, 구매하지 않든, 최대한 독자들이 새로운 만화에 노출될 기회를 만들어주어 고마웠습니다.
그 외의 새로운 시도
- 출품 작가도 티켓팅을 하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하는 구조. 왜 이렇게 운영하는지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아무래도 작가들의 심적 부담을 낮추기 위해 의도한 듯합니다. 작가의 상주로 인한 각종 부담을 없애기 위한 판매전인데 관람객으로라도 작가들이 방문하면 굳이 판매+전시형태로 진행한 의의가 흐려질까 우려한 게 아닐까요?
- 페어에 가면 부스 맵을 주는데요, 칸새에서 나눠준 소책자에는 출품작 정보와 함께 운영진들의 소회를 담은 만화와 설문조사 QR, 출장편집부 등에 참여한 문학동네의 출판만화 소개가 알차게 들어 있어 좋았습니다.
-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독립출판의 특성상, 책 정보를 모두 받아본 운영진이 만화의 명대사를 차용하여 알듯 모를듯한 카테고리를 만들었습니다. A.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무언가가 벌어진다, B.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C. 역시 인간은… 재밌어!! 등인데요, <여섯잎클로버>는 C 카테고리로 편입되었어요. 휴, 재밌어.
- 문학동네 및 쪽프레스에서 출장편집부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피드백을 받을 만큼 완성된 만화가 없어서 신청하지 않았습니다만, 객관적인 피드백에 항상 목말라 있는 독립출판 작가들에게는 빛과 소금같은 행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출장편집부 피드백 받아보신 작가님들의 후기도 궁금하네요.
내년의 칸새는 어떨까?
다음 행사는 아직 미정이며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올해의 규모 정도로만 매년 운영해주신다면 독립출판 만화계의 연례 행사로 완연히 자리 잡을 것으로 보입니다.
운영 측면으로는 아직 정산과 재고 반환이 남아 있는데요, 바로 어제 정산 계좌와 재고 반환 주소를 묻는 메일이 와서 행사 끝나고 지금까지 엄청 고생해서 정리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내년 칸새에는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신청해볼 수 있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내가 제발 힘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난 편지에 적었던 것처럼 단편과 버찌 만화를 동시에 작업해서 여름에 완성하는 것이 목표에요. 오늘은 비밀 편지 적느라고 원고에선 살짝 이탈했지만 내일부터의 나, 다시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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